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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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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마누엘한인연합감리교회 댓글 0건 조회 175회 작성일 20-09-06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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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곡, ‘낭만에 대하여’)



목사가 가요를 듣는다고 뭐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목사는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CCM 뿐만 아니라 그레고리안 성가도 좋아할뿐더러, 가슴 뜨겁게 옛 추억을 돌아보게 만드는 708090 대중가요도 좋아합니다. 문화를 입힌 시가 노래가 되고, 여기에 리듬이 더해지면 우리는 마음을 모아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한국처럼 노래방이 여기저기에 있으면 잠시 들러 한 번 따라 부르고 싶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를 잠시 입 속에서 곰삭이며 제목 그대로 ‘낭만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왜 지금은 낭만을 이야기 하지 않을까?’ ‘낭만’을 품었던 시간을 추억으로 삼으면서도 지금 나이가 들어 왜 ‘낭만’을 이야기 하는 것을 두려워할까? 신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세속적인 단어라서? 낭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풋사과 같이 영글지 못한 것이라서? 아니면 최백호의 노래처럼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바로 낭만은 지나가 버린 젊은 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게 있어서? 그래서 너무 먼 곳, 먼 시간 저 너머 지금의 나와는 상관 없는 감정이라고 느끼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저도 낭만의 시간을 20대, 그것도 대학교를 다니던 가슴 뜨거웠던 때의 한정적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청춘의 낭만’, ‘낭만의 캠퍼스’라고 표현하는 시기겠지요? 그 시대에 낭만이 가능했던 이유는 ‘방황’이 허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몸은 다 컸는데 정신의 성숙은 따라오지 못했던 저의 20대 초반은 새로운 사춘기와 같았죠. 획일화된 대학입시 문화에 매몰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한 대학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공부와 스승을 선택하는 것도, 이념을 따르는 것도, 매력적인 아가씨를 따라다니는 열정도 모두 다 나의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자유는 때론 섣부르고, 때론 위험하고, 때론 준비되지 못한 것이었지요. 때문에 그 시기는 아픔이 많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섣부름과 위험함은 친구들에 의해, 선후배들에 의해, 또 지켜보는 어른들에 의해서도 관용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우리는 방황의 시기를 낭만의 때라 기억하는 것이겠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현실의 장벽보다 큰 이상을 품은 시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0대...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꿈이 컸습니다. 독재의 잔재를 없애버리고 한국사회에 민주주의를 완성하겠다는, 남북한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시대의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꿈이 가득한 시기! 그 꿈이 있고, 함께 꿈꾸는 친구들이 있어 영글지 못해 혼란스러운 가슴은 여전히 뜨거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 꿈의 시기는 낭만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40대 후반에 서 있는 저의 현재는 더 이상의 방황이 용인되지 않고 책임이 앞서는 때입니다. 방황이 인정되는 낭만을 꿈꾸기에는, 이상을 이야기 하며 살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너무나 현실적인 중년의 남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섣부르고 위험하고 준비되지 못한 어설픔은 피해야 하는 리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낭만을 말 하지 못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겠지요?


최백호의 흘러간 노래(그것도 내 나이 또래는 부르지도 않는 그 노래)의 가사를 잠시 읊조리며 짧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다시 낭만을 노래할 수 없을까? 나의 종교와 신앙 안에서 생각해 보니 아직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하고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 안에서 죄인된 나의 섣부름과 어설픔이 받아들여 질 수 있다면... 현실의 장벽 안에서 분주함에 메여 사는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더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꿀 수 있다면... 중년의 나는 여전히 ‘낭만에 대하여’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섣부름 위에 성숙이, 위험함 위에 바른 길이, 어설픔 위에 경험이 좀 더 쌓여 있기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더 아름답고 성숙한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힘든 팬데믹의 시기에, 어둠 속에 잠든 낭만을 잠시 깨우고 싶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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