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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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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마누엘한인연합감리교회 댓글 0건 조회 78회 작성일 20-10-25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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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선 은둔한 재야의 고수가 세상으로 뛰쳐나와 부른 “테스형”이란 제목의 노래가 화제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나온 추억의 가수를 찾아 지상파 TV를 켜고 시청한 사람들의 시청률이 29%에 육박했고, 유튜브 등의 온라인 접속률이 폭주했으며, 중국에선 불법다운 받은 콘서트 장면이 정식 사이트에 버젓이 게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당시 콘서트에서 가수 개인의 멘트가 정치권까지 이어지며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도구로 활용될 정도로 인용되는 그 가수의 이름은 ‘나훈아’입니다. 저도 궁금해 찾아보고 들어본 테스형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 본 저 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 가요 테스형. 아 테스형(×7)


‘아 테스 형님’을 반복하는 노랫소리 가운데 현자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소환되고 있습니다. ‘지혜’가 필요한 시대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정치꾼이 아니라 지혜로 세상을 다스릴 철인(哲人)이 필요한 시대라서? 그것도 아니면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혼란한 포스트모던 사회에 분명한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필요해서? 시대를 읽는 눈과 죽음 이후의 종교적 관심까지 노래하는 나훈아의 테스형에게 사람들이 이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부조리 앞에 용기 있게 대항했던 시대의 철인은 자신을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고발한 소피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에게 굴복한 법원의 판결에 의해 사형을 당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변호사 없이 법정에 나와 스스로를 변호한 내용을 기록한 플라폰의 대화편 『변명』을 보면, 그가 수많은 예와 비유를 들어 자신의 무죄를 밝히는 논리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과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시민사회에 더 큰 해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테스형의 이런 자뻑(?)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던 소피스트와 다르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무지의 사실’이 그의 철학함의 출발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시대의 통념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대답과 어떻게 다른지를 궁구하게 되었지요. 그 결과 본인이 진리 안에 분명히 서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말’을 성공하기 위한 기술로 파악하고 있던 당대 주류 철학자 소피스트들과 다르게 테스형은 자신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진리를 수많은 대화를 통해 끄집어내는 산파술의 도구로서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에게 말과 대화와 논쟁은 자신을 드러내는 성공의 도구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었던 것이죠.


미국의 문예비평가 월터 옹은 이러한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결을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결로 파악합니다. 현란한 말보다 생각을 심오하게 표현하는 문자가 문명 안에 힘을 얻게 된 것이 서구사회의 소크라테스로부터 기원한다고 본 것이지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란 책도 결국 문자로 남긴 저자가 플라톤임을 안다면, 우리는 그 공을 테스형이 아니라 플라톤 형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20세기의 대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중국의 공자,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활동한 주전 8세기~2세기까지의 시대를 인류의 문명이 진보한 ‘차축시대’(axial period)라고 불렀습니다. 이 시대는 월터 옹의 표현처럼 말보다 문자가 힘을 갖기 시작한 문명사적 전환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예언자들도 그들의 예언이 문자로 성경에 기록되면서 ‘문서예언자’들로 불리고 있는 것도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처럼 ‘말’이 집약된 ‘문자’는 인간의 사유를 더 깊고 넓게 확장하는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후보들의 비상식적인 말과 행위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팬데믹의 어마어마한 위협을 음모론으로 받아들이고 선거에 사용하는 것도, 지지층을 결집시켜 선거에 이기기 위해선 인종차별적 발언과 태도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것도 ‘비정상적인 것의 정상화’ ‘비상식의 상식화’가 낳고 있는 현상입니다. 말을 줄이고 아끼며 문자로 생산해 냈던 차축시대의 현자들을 보며 우리가 배울 것도 마찬가지이겠죠? 악의적인 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말보다 세상을 치유하는 말씀이 우리에게 절실한 때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세상의 악의 한 가운데서 ‘사유의 죽음’ ‘선지자의 죽음’을 경험했던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소환되고 있나 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나훈아와 함께 노래합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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