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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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마누엘한인연합감리교회 댓글 0건 조회 311회 작성일 23-09-11 12:42본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이라는 그림을 보면 작은 방에 책상, 의자, 촛대가 2개씩 놓여있습니다. 고갱(Paul Gauguin,1848-1903)에 대한 우정과 그리움을 그림에 담아 그려낸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수넴여인이 엘리사에게 ‘아를의 반 고흐의 방’과 같은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꾸며 줍니다. 엘리사가 그 방에서 무엇을 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왕하 4:11를 통해 유추컨대, 사역 이후에 잠시 쉼을 갖거나 혹은 의자에 앉아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계획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볼 것은 의자라는 것은 단순히
‘앉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자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의자는 갯수에 따라 혼자만의 공간일수도, 둘만의 공간일수도,
혹은 공동체의 공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1817~1862)의 [윌든]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집에는 3개의 의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 의자는 친교를 위한 것입니다”. 소로우는 자기 집에 있는 3개의 의자를 통해서 ‘홀로앉음의 자리’, ‘마주앉음의 자리’, ‘둘러앉음의 자리’라는 관계(關係)를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홀로 있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누군가와 혹은 무엇인가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부득이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이면
스마트 폰을 통해 통화를 하거나 영상, 음악, 게임 등을 통해 자기와의 대면을 회피합니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시간이
‘침묵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영성 프로그램 중에서 ‘침묵의 시간’을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 명나라의 문인이었던 진계유의 고백은 위의 사실을 더 진(眞)하게 해줍니다. “고요히 앉아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우리에게는 홀로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우니까 인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누구나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의 시간을 나를 발견하는 시간으로 바꿔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껍데기의 나’, ‘주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나’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엘리야도 의자에 홀로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했을 것입니다. ‘도데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하필이면 수많은 사람가운데 내가 선택되었단 말인가?’,
‘왜 나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단 말인가?’라는 이 모든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엘리사에게 있어 사역은 정리되지 않은 과업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실존적인 내면(內面)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홀로앉음의 자리입니다.
그렇다고 홀로앉음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마주앉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주앉음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앉아있는 자리’입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항상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은 홀로앉음의 자리에서
항상 하나님과 마주앉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시16:8)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욥기 1~37장까지는 홀로앉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욥기 38장을 지나면서 하나님과 마주앉음의 자리로 넘어가며 그는 고난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홀로앉음의 자리’는 자기성찰의 시간이지만 영적성찰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과 마주앉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자기성찰에서 영적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자기성찰까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과 마주앉는 자리까지 나아가기 때문에 영적성찰,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기성찰, 영적성찰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둘러앉음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자기성찰, 영적성찰에서 머문다면 그건
수도원의 삶과도 같습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수도원이 아닙니다. 혼자만 자아성찰하고 구원받아 영적성찰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히3:1)라고도 부릅니다.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둘 이상이 모인 신앙공동체가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시면서 둘러앉음 자리의 중요성을
예시(豫示)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삶의 의자가 몇 개 있습니까? 소로우가 3개의 삶의 의자를 준비한 것처럼 여러분은 몇 개의 의자를 가지고 계십니까?
‘홀로 앉음’의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 ‘하나님과 마주앉는 시간’을 통하여 영적인 성숙을 이루고,
‘서로 함께 둘러앉는 시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아름다운 자리를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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