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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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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마누엘한인연합감리교회 댓글 0건 조회 160회 작성일 19-06-16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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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영화계에 흥행을 불러 일으켰던 나홍진 감독의 공포영화 〈곡성〉은 딸이 아버지에게 절규하며 묻는 대사를 통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암시해 주었습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어린 소녀 배우가 찰지는 전라도 사투리로 묻는 물음은 선한 의도도 결국 그 분별력을 잃어버릴 때 악의 세력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악이 숨겨져 있는 복잡한 세상의 시스템 가운데 의심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이 의의로 비극적 결말을 불러올 수 있다는 영화적 해석인 것이죠. 비록 공포영화란 장르를 통해 묻고 있었지만,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고민하고 성찰할 주제는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라는 삶의 지향점을 묻는 철학적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어제 U-20 월드컵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준우승을 차지했습니다. FIFA 주관 국제경기에서 처음으로 한국대표팀이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결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축구를 포함한 모든 스포츠의 목적은 강화된 선수 개인의 체력과 기술, 그리고 팀의 전술적 운용능력이 어우러진 승리를 향한 도전과 경쟁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선수들을 키운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또 승부의 결과에 앞서 경쟁과 도전의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즐거움을 잃어버린 승부는 승리와 패배의 강박증에 빠진 민족주의나 배타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1994년 월드컵에서 자책골로 팀이 패배하자 술집에서 피살당한 콜롬비아의 에스코바르 선수의 예처럼 실수한 선수를 암살하는 집단적 광기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번 경기를 특별히 차분하게 즐겼습니다. 이번 경기가 매우 흥미로왔던 점은 우선 한국 대표팀의 결과가 매우 좋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몸값에 매여 있는 전형적인 프로팀 소속 성인 선수들과 다르게 몸을 사리지 않는 젊은 선수들의 투혼이 매 경기의 흐름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반전에 지다가 후반전에 역전하기도 하고, 전반전에는 수비 중심으로 가다가 후반전에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화되는 전술적 즐거움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선수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경기를 보며 “뭣이 중한디?”라고 묻는다면, 선수나 팬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겠죠?


최근 몇 년 사이에 서구의 인문학계에서 가장 핫(Hot)한 학자 중 한 사람이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입니다. 그를 세계 학계에 알린 대중적 저작인 〈사피엔스〉를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류 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지구상에서 주인이 된 이유를 △언어의 발전을 통해 네안데르탈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인지혁명’ △ 세계의 4대강을 중심으로 대단위의 농경지 문화를 발전시킨 ‘농업혁명’ △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과학혁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농업혁명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견해가 매우 창의적입니다. “농업혁명은 사기다”라고 과격하게 표현하며 그는 농업혁명이 인류를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수렵생활을 강제적으로 종료시키며, 대단위 재배로 인한 인구의 증가와 이를 통해 필연적으로 발전된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계급을 나누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농업이 오히려 인간을 정해진 땅에 묶어두어 자유를 상실케 했다고 비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 “밀을 키우는 인류가 오히려 밀의 가축으로 전락했다”는 것이지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 결과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현대인의 자조가 농업혁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농업을 통해 생존을 추구하던 인류가 생존에 매여 행복을 상실한 이유를 유발 하리리는 농업기술의 발달에서 찾은 것입니다.


목회하며 가끔 스스로에게 “뭣이 중한디?”를 묻습니다. 목회자가 스스로의 존재와 사역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면 그저 일의 관성에 매어버리기 때문에, 저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끔씩 목회의 매너리즘에 빠질 때마다 질문합니다. “뭣이 중한디?” 일을 열심히 하다 사람을 잃어버릴 때 질문합니다. “뭣이 중한디?” 재정과 사람이 없어 사역을 중단하려고 할 때마다 묻습니다. “뭣이 중한디?” 공동체가 회복되고 부흥할 때, 오히려 교회를 크게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것처럼 여겨져 질문합니다. “뭣이 중한디?” 신앙생활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냥 교회를 다니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묻습니다. “뭣이 중한디?” 그리고 오늘도 교회에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도 묻습니다. “뭣이 중한디?”


- 이준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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